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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돌들이 외치리라

지난 24일 워싱턴 DC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March for Our Lives’라는 이름으로 총기규제, 생명존중과 인권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시민들이 일어난 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정치집단에 대한 압력을 위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시작된 것이다. 총기로 인하여 어린 학생들이 매번 희생되어도 정치인들은 자기의 이익만을 지키고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 무능한 정치인과 정부를 향해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항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시민들이 일어나 무능한 대통령과 정부를 바꾸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를 시민혁명이라 한다. 더는 국민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정부와 정치인들을 좌시하지 않는 시민주권 의식이 살아난 것이다. 미국 전역에서 버스와 항공기를 이용해서 모였고, 내셔널 성공회 대성당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일찍이 공표하며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였다. 성경에도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일어나 외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며,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귀한 존재라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가치가 영원히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생각과 상식, 존재의 책임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환경을 보라, 인간의 이기적이고 무지한 힘과 능력으로 얼마나 많은 자연과 질서와 정의를 파괴하고 있는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뻔한 해법을 두고 총기 문제를 해결 못 하는 정부, 이러한 결과 민초들의 외침과 저항이 솟구쳐 올라오고 있다. 이대로는 인간답게 살 수 없고, 공동체가 멸망한다는 절실함에서 시민운동은 시작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총기사건의 희생자가 내가 아니어서 안심되는가? 이민자들을 향한 인권의 불이익에 대해서, 나는 시민권자니 안심이라고 생각하는가? 인종과 소수자들을 향한 불이익과 차별 정책 등 미국 사회 문제는 나와 상관없다고 방관하고 있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는 모두 나의 문제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권리와 책임에 대해서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 그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참여하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다. 따라서 내가 움직이고 내가 나서야 변화가 일어난다. 참여가 없는 사회는 절대로 변화할 수 없다. 공동체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서로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상생의 정신으로 바라볼 줄 아는 지혜와 행동이 필요하다. 우리의 일이요, 우리가 함께 바꾸어 가야 할 것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이런 전국적인 돌들의 외침에 나가보면 우리 한인들의 참여가 너무나 저조하다. 대부분 생계에 매여서 어렵다고 하지만, 주말마다 골프장과 친교 모임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미국 땅에서 이방인 노릇만 하며 주인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대접받으며 살기에는 부족하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 자기는 몇십 년을 살았지만, 이태원에 사는 것 같다고 한다. 공동체와 소통을 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사니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몸은 미국에 있지만, 마음은 한국에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행복이란? 몸과 마음이 일치되어 느끼는 것이다. 정신과 영적으로 그리고 육신의 건강한 삶을 누리고 행복하려면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일 것이라고 본다. ▷410-818-8213 이완홍신부/메릴랜드 성요한 성공회

2018-03-27

스스로를 닦아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예기’에 나오는 말로 혼란한 시기에 서로 잘났다는 인물들이 나와 우후죽순처럼 권력을 잡으려 하니, 이에 먼저 자기 인품을 닦고, 가정을 잘 이루고 나라를 다스려야 비로소 세상에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란 인격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인격이 부족한데 돈과 권력이 있다고 리더가 되는 것처럼 세상에 불행한 일은 없다. 인류 역사는 그런 자들로 인하여 문명이 파괴되었고 분쟁이 일어났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도리와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온갖 추문에 휩싸여 있다. 성추행과 뇌물과 부정한 일들로 손가락질을 받는다. 나이와 배움도 소용이 없다. 제법 유명하다는 사람들이 비상식적인 못된 짓에 연루되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있어 온 일이었지만, 약자들의 울부짖음은 항상 권력에 묻혀버렸다.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져야만 한다. 정상적인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너무 오랜 세월 왜곡된 의식 속에 갇혀 살았기에 이제는 그것을 벗고 정상적인 인간성 회복 운동에 나서야 할 때이다. 어느 집성촌에서 경험한 일이다. 온 마을이 집안이라 유교적인 위계가 있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마을이 개발되고 갑자기 땅값이 올라 졸지에 부자들이 생겨나고 개발이익에 눈 뜬 젊은층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나이 들어 재테크에 밝지 않은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소외되었다. 어느덧 재력 없는 어른들은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마을이 발전하면서 개발로 인한 인간성의 타락도 볼 수 있었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어른 취급도 못 받는다는 어르신들의 넋두리가 현실이 되었다. 예전에는 어른이 있고, 인품만으로 충분히 존경받았다. 그분들의 인격을 따라 배우려는 마음들이 많았다. 지금의 교육 목표는 무엇인가? 자녀들 교육에도 인성을 키우는 것보다는 돈 잘 버는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되어 있고, 세상에서는 이를 성공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일그러진 사회상속에는 바른 인성교육과 실천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 있다. 먼저 내 자녀부터 올바른 인성을 위해서 부모가 바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가장 나쁜 교육 가운데 하나는 부모는 잘못 살면서 자녀에게 “너는 나 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요즘 교회에서 중독치유 모임을 한다. 알코올과 마약 등 여러 가지 현대사회에 만연한 중독들을 논하면서 결국은 부모와 가정생활로부터 후손들의 중독성이 습득된다는 말을 들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인격이 가족에게 유전처럼 전해진다니 무섭기까지 하다. 현대 사회는 편리함과 더불어 인간성을 파괴하는 요소들이 많다. 수많은 사람이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람들이 배움이 부족하고 똑똑하지 않아서 그런 어리석은 죄악에 빠진 것은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인격장애로 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산다. 깨어서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종교나 각자의 노력으로 수덕(修德)생활을 하는 것은 재물의 복과 성공이 목적이 아니다. 나의 인성을 바르게 하기 위한 노력이다.  성인이나 존경하는 분들의 인격을 배우며 거울로 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안전하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수도자 같은 자세로 자기를 돌아보고 인격을 닦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문의: 410-818-8213 이완홍 신부/메릴랜드 성요한 성공회

2018-03-13

[이완홍 신부 칼럼] 마음에 두는 사람

성공회대학교 교수였던 신영복 선생은 삶을 이렇게 가르쳤다. “사람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삶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사람의 준말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그렇게 사람으로 삶을 살다 돌아가셨는데 지인의 말에 의하면 암의 고통 속에 죽음에 이르자 당신 스스로 곡기를 끊고 마지막을 준비하시고 가셨단다. 마치 고승들이 입적하듯이 육신의 고통 가운데도 정신이 살아 계셨던 분이었다. 그분은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동학의 인내천사상처럼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귀하게 생각하고 모든 사람에 대해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은 분명하다. 요즘은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돈을 위해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쉽게 포기하고 사는 이들이 많다. 세상 부모들도 자녀들의 효심을 돈으로 평가한다니 돈 없는 자녀는 효도하기도 어렵다. 신영복 선생님은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좋아하셨다. 아마도 20년이 넘는 수감생활로 인하여 사회와 단절되어 사는 동안 사람에 대해 그리움과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도 늘 제자들과 직원들과 어울려 공을 차셨는데 그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차별하는 법이 없었다. 사람이 잘나고 못나고는 별 차이가 없으니 더불어 숲을 이루어 살자고 하셨다. 더불어라는 우리 말이 생각할수록 정겹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안에 평화스러움과 정이 듬뿍 담겨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는가? 세상일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다. 평화를 이루고 정의를 이루어 내는 것도 함께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된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함께 사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더불어 사는 사람의 근본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하고 좋은 책을 통해서 자기를 수련하지 않는가? 좋은 인격을 만드는 것은 내 안에 있는 크고 작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을 비운다고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세상은 바보라고 한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다가 사람을 잃는 것을 본다. 어떤 사람이 꾸어준 돈을 받지 못했다. 채무자를 찾아가니 그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먹을 것조차 없더란다. 그 삶이 불쌍하여 쌀을 가져다주고 오히려 위로해 주었더니 그렇게 고마워할 수가 없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그나마 사람에 대한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돈은 어차피 잃었지만, 사람은 잃고 싶지 않았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어지지만 모든 사람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환경이 변한다고 의리를 저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 어디에도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다. 나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사람도 없다. 솔직히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고 스스로 실망하지 않는가? 이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족한 사람에 대해 연민을 갖고 바라보자.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하고 고마우면 고맙다고 표현하며 서로를 너그럽게 껴안고 살면 좋겠다. 잘나면 얼마나 잘나고 부족하다고 실망할 것 없다.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 짧은 인생길을 함께 가노라면 언젠가는 함께 웃으며 기뻐할 날도 오지 않겠는가? 벌써 1월이 다 지나간다. 새해에 품은 소망을 잘 간직하여 사람과 삶을 깊이 생각하며 살만한 한인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2018-01-31

[살며 생각하며]소수 민족이 함께 사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미국은 노르웨이 같은 우월한 이민자를 받아야지 아프리카와 남미인들 같은 거지국가로부터 이민은 막아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어찌 보면 트럼프 수준의 막말이다. 법대 교수인 친구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미국보다 더 좋은 의료제도와 교육시스템, 사회보장제도가 좋고 총기규제도 잘되어있는 안전한 노르웨이 사람들이 왜 미국에 이민을 오겠는가? 웃기는 트럼프”라고 적었다. 시내를 다녀보면 곳곳에서 모든 험한 일은 대부분 남미 노동자들이 감당하고 있다. 그들은 적은 임금을 받고도 큰 불평 없이 일을 감당하고 있다. 이들에게 정당한 인권이 보장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자기 나라에서 누리지 못하는 작은 행복을 고된 노동과 바꾸어 살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오만함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극에 달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라는 가치는 사실 밑도 끝도 없는 트럼프의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번영이라는 욕망을 위해서 인디언 원주민을 시작으로 얼마나 많은 민족과 나라들을 착취했는지 기억해야 하고 역사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인 착취가 이들 나라 가난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미국은 이들의 빈곤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 민족주의를 내세운 배타적인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자기만을 주장하고 이기적인 삶을 사는 개인이나 국가는 세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이제 세상은 인터넷을 통해 누구와도 소통하고 어디에 살든지 정보를 나누고 교류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땅 위에 장벽을 세워서 국경을 가로막고 이민자들을 차별하고 살겠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이다. 사실 트럼프처럼 남들과 함께 살기를 거부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지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은 트럼프 타워 꼭대기에서 황금으로 도배한 감옥에 갇혀 홀로 사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하며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소수계 이민자들의 일상을 하느님은 더 귀하게 보실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웃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더 많다는 사실에 희망을 품는다. 미국은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와 언어와 종교가 있기에 아름답고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다양성을 가로막는 것은 미국의 건국 이념과 가치에 역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한인만을 위한 일을 하지 말고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연대하여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관심과 지혜를 모으는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이완홍 신부/메릴랜드 성공회 성요한교회

2018-01-16

[이완홍 신부 칼럼] 새해를 사는 가족

새해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가정의 화목과 번영을 가장 큰 소망으로 말한다. 좋은 가정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모두의 소원이지만 절대 쉽지 않다.  세월이 지나면 자녀들이 가정을 꾸리고 부모의 곁을 떠나 독립한다. 떠나는 자식이 아쉽겠지만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한국인 가정은 자녀들을 더 오랫동안 품고 사는 것 같다. 서른이 넘어도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리고 자녀에 대해 사랑과 기대도 크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다. 자녀에게도 부담 주지 말고 가능한 한 일찍 독립시키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나이 들면 부모는 자녀로부터 무언가 도움받고 경제적으로도 힘이 되어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녀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현실적으로 장벽이 많다. 자기 자신이나 잘 돌볼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미국 교인도 말하기를 요즘 아이들이 고생을 피하려고만 하고 약해졌다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살아온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그만큼 시대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요즘 부모들은 내 자식이 고생하는 꼴을 보지 못한다. 고생이기보다는 성장의 한 과정일 텐데 두고 보지 못한다. 그러면 독립적으로 살아갈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정에서 부부가 건강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서 지나치게 희생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왜냐하면, 희생과 정성을 쏟을수록 자녀에 대한 집착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이치를 보자, 사람의 손이 안 닿고 자연에 맡겨진 것들이 더 멋있게 잘 자라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재주가 대단해도 자연에 비교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손을 너무 타면 오히려 잘못될 수도 있다. 인간의 생각과 지식이 자연의 이치를 이기지 못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자녀를 믿고 맡기니 스스로 잘되는 것을 주위에서 많이 보았다. 때로는 나도 자녀들에 대해 걱정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걱정하는 것 보다 자기 자신이 더 걱정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녀들에게 자기 생각을 키워주는 것이 먼저 교육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본인 스스로 자기의 문제와 어려움을 생각하고 이겨낼 힘을 키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하기도 전에 부모가 먼저 나서면 자녀들은 해결 능력을 키울 기회를 잃어버린다.독립적인 사고를 갖고 스스로 하려고 생각할수록 서로에게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이 신뢰이다. 미숙한 자녀를 보면서 어른들이 자녀를 믿고 맡기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어른들이 먼저 교육되고 훈련이 되면 우리 2세들에게 희망을 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훈련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자녀에게서 독립하는 연습을 한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오랫동안 사목하면서 느낀 것은 자녀들이 성실하게 자란 가정은 대부분 부부 금실이 좋은 가정이었다. 부부가 서로에게 집중하면 자녀들은 그만큼 자유롭게 성장한다. 그리고 부모의 관계를 보고 가족을 배운다. 자녀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배우는 것보다 좋은 교육은 없다. 예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살면서 스스로 말씀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새해에는 가족들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함으로 화목을 이루어서 하늘나라가 가정에서 먼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410-818-8213 이완홍 신부 / 메릴랜드 성공회 성요한교회

2018-01-02

[이완홍 신부 칼럼] 예루살렘의 고통

트럼프의 예루살렘 수도인정이라는 뜬금없는 발언으로 전 세계가 공포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던 일에 트럼프가 불을 댕긴 것이다. 그나마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던 예루살렘에 저항과 불만의 소리가 더 커졌고 더 큰 중동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그동안 국제적으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곳으로 인정되어왔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군이 장악하고 있다. 그만큼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민감하고, 오래된 역사의 실타래를 누구도 함부로 풀 수 없기에 평화지대로 놓은 것이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는 발언을 했으니 화약고에 불을 지른 셈이다. 언젠가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처음 여행이었지만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 이스라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난히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이 큰 것 같았다. 과거에 성지가 지금은 장사꾼들에게 점령당한 것을 보면서 실망스러웠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대 정책과 억압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10년 전만 해도 관광버스를 운전하는 팔레스타인 사람에게는 급여가 없었다. 여행객들이 주는 팁과 개인적으로 파는 영상물과 책을 팔아 수입을 얻는다고 안내하는 목사님이 말씀해 주셨다. 그만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일들이 일상화되어 있었고 그들은 부당함 속에서 저항하며 살고 있었다.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같은 하느님과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처량해 보였다. 거리마다 장전된 총을 들고 서 있는 소녀티를 못 벗어난 이스라엘 여군들의 눈에서는 적대적인 눈빛을 볼 수 있었다. 항상 죽음의 공포를 껴안고 살아가는 전쟁터에서 선량한 미소와 여유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듯싶었다. 양측의 젊은이들은 불행한 역사가 만들어 놓은 비극의 한 장면을 장식하고 있는 엑스트라에 불과할 뿐이었다. 서로 공존하며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산다면 모두에게 얼마나 좋은 일일까 싶다. 특히 예루살렘이라는 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종교적인 행위들을 하느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 것인가? 종교가 평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종교만 내세우며 남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어떤 행위들도 하느님이나 알라의 이름으로 정당화 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유와 평화, 인류애의 정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다음 달 우리 교회 미국 신자들이 예루살렘 방문을 예정하고 있다. 이미 1년 전부터 준비된 일이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국무부에서 어떤 여행지침이 나오는지 주시하고 있다. 국가 지도자는 나라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국민을 평화롭게 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이다. 경제적으로 나아진다 해도 평화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지금 미국은 매일 아침 뉴스 보기가 두려운 나라가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정제되지 않고 떠들어대는 트위터에 따라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안고 하루를 시작한다. 분노하는 이슬람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불안해진 유대인들과 미국인, 모두가 지도자를 잘못 세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2000년 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번 성탄절이 희망으로 다가오기를 소망한다.   이완홍 신부 / 메릴랜드 성공회 성요한교회

2017-12-20

[이완홍 신부 칼럼] 성(性) 윤리를 가르치자

아침마다 즐겨보던 투데이 뉴스 남자 앵커가 성추행 전력이 드러나며 방송에서 퇴출당하였다. 때마다 유명인들의 성추행 전력이 드러나 사회적 논란이 된 것은 하루아침의 일은 아니다. 사회 전반으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심지어 종교계에서도 추문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심각함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결국에는 사람 간의 불신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사회문제이다. 실제로 피해자인 여성에 대한 성 의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모른다. 더구나 인터넷으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포르노그래피의 폐해로 인하여 성 의식은 점점 더 잘못되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성 윤리 교육은 모두에게 필요할뿐더러, 인간존중 운동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미국 성공회 교단에서는 모든 성직자와 리더, 봉사자, 직원들은 반드시 성 윤리 교육 이수를 의무화하고 5년마다 재교육을 받도록 한다. 그 내용을 보면 성인과 미성년으로 나누어 교회 활동이나 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고 실제로 일어났던 사례들과 피해자들의 증언도 듣고 대처 방법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성을 대하는 태도를 실제로 교육한다. 이런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아무런 교육이 없다면 이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인들이 운영하는 모든 곳에서도 이러한 성 윤리 교육은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는 성적인 문제들은 덮어두고 감추려는 경향이 많다. 성 윤리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고,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가정교육이나 학교의 가르침도 부족하고 군대에서도 성 윤리 교육을 받아본 기억이 없을 것이다. 혹자는 이제는 여성을 잘못 쳐다만 보아도 추행이라고 한다는 볼멘소리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된 성 윤리관 속에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사회에서 이러한 일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를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몇 년 전 한국에 있는 교회에도 이런 성 윤리 교육의 필요성을 알려주고, 교육하라고 정보를 보내준 일도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성 윤리 교육을 공식화한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없었다. 습관적으로 하는 언어적 희롱이나 행동들이 자칫 상대방 이성에게 줄 수 있는 위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네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하는 황금률의 마음을 갖고 행동하기 위해서 먼저 성 윤리에 대해서 배우는 이성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야 남을 배려하고 그를 위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 아동과 여성들에 대해서 가벼이 여기고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각성해야 한다. 특히 교회에서 성서를 남성 중심이 아닌 남녀평등의 눈으로 보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부터 먼저 성 윤리 교육을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기성세대들의 고정관념을 바꾸고 젊은 세대에게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살아야 할 진지함에 대해 알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건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여성은 곧 내 어머니이며 아내이고 누이고 나의 딸인 사실을 알아서 우리의 성 윤리 수준이 변해야 할 것이다. 이완홍 신부 / 메릴랜드 성공회 성요한교회

2017-12-06

[살며 생각하며] 교회 개혁 500주년의 의미

올 한 해 동안 기독교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해서 개신교회는 다양한 행사를 통해 그 의미를 기념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교회 개혁이라고 해야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반성과 회한을 담고 있고, 교회의 사명을 확인하고 회복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기념만 해서는 안될 것 같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지적을 당하는 현실에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교회 개혁을 기념하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1517년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을 보고 마틴 루터 사제는 권력을 가지고 세속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 앞에 정신 차리라고 혁명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고, 루터의 교회 혁명으로 개신교회가 탄생하였다. 사실 종교 개혁의 시작은 예수로부터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지 않았다면 왜곡된 종교로부터의 해방은 없었을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욕심을 부리고 권력을 가지고 돈을 축적하면 반드시 타락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겸손하게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나누면 그곳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중세교회는 절대권력으로 무지한 민중을 지배했다. 그리하여 사랑과 겸손으로 이웃을 섬기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잃어버렸다. 스스로 교만과 탐욕에 침몰해 버린 것이다. 민중은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었고, 희망의 복음을 들을 수 없었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도 희망의 불꽃은 교회에 살아있었다. 교회의 세속화를 보고 일단의 사람들은 예수의 정신을 되찾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신앙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세속화된 교회 안에서 영성 회복과 믿음의 본질을 찾기 위한 운동이 수도 공동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회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를 보고 배우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개혁운동은 루터 이전에도 교회 안에서 지속해서 있었다. 사실 교회는 완전하지 않고 불안하다. 그래서 항상 신앙의 근본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사람이다. 교회는 그 시대의 자화상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그대로 비추어 준다. 구교, 신교를 비교하며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교회는 같은 길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시대를 앞서보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잘못된 세상에 대해서 진리와 정의를 말해 주어야 한다.그리고 시대적 불안을 거두고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삶으로 인도해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항상 개혁되고 변화하여 세상에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 시대의 어려움과 세대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서 나아가는 교회를 사람들은 원한다. 이 시대 사람들이 왜 교회를 외면하는지를 깨달아 변화하는 교회가 된다면, 그것이 루터가 원하던 진정한 교회개혁이 아닐까? 이완홍 신부/메릴랜드 성공회 성요한 교회

2017-11-07

[살며 생각하며] 가족이 소중하다

추석 한가위 같은 명절에는 가족과 고향이 더 그립다. 반갑게도 여동생이 추석을 지나 미국에 오기에 손꼽아 기다렸다. 마지막 만남은 6년 전 한국에서다. 삼 남매가 제각기 나라를 떠나 살면서 서로 만날 기회가 쉽지 않다. 가족은 함께 있어야 가족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이민 생활을 하는 사람은 이러한 아픔과 그리움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산다. 먼 거리만큼 가족의 마음도 멀어지는 것 같아서 때로는 서글프다. 가족 형태가 시대에 따라 바뀌어 간다지만 그래도 형제, 자매와 친지들이 그리운 건 변함이 없다. 삶의 추억을 오랫동안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을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했다. 함께 여행도 하고, 좋아하는 음식도 같이 나누고, 옛날을 회상하며 또 다른 추억을 만들고 싶다. 미국 안에 가까이 살면서도 가족 간에 멀어진 이들을 많이 보았다. 살기가 어렵다 보니 관계도 복잡하다. 그렇다고 서로 안 보고 사는 것이 잘사는 건 아닐 것이다. 자녀들 보기에 부끄럽고, 어른들도 낯이 안 서는 일이다. 서로 화해하며 어울려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 아닌가? 머나먼 남의 나라에서 살면서 서로 화목하지 못하면 마음이 많이 불편할 것이다. 돈 때문에, 종교 때문에, 생각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투고 분열하여 사는 것처럼 못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지 않은가? 명절마다 고향을 찾아온 가족 간에 다투고 헤어지는 모습을 한국에서 많이 보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족 간에 불편한 관계가 많다고 한다. 예전같이 대가족도 아닌데, 오히려 가족 간의 갈등은 더 많아지고 심각해진 것 같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에도 결별하고 사는 사람도 제법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사람 관계도 그렇지만 가족 간에는 더 많은 배려가 있어야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세심한 주의와 예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만의 생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쌓이면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부부가 행복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서로에게 많은 배려를 해야 한다. 가족과 친지 사이에도 어른은 어른대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대로 지켜야 할 예의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어른이라고 대접만 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으로, 너그럽게 베푸는 어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를 쉽게 대하는 것은 언제나 없어야 한다. 요즘 자녀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는 열심만큼, 가족과 이웃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가르치는 것이 더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이민 사회는 실제로 가족 공동체이다. 몇 사람만 넘어가면 대부분 연관이 된다. 그러니 서로 가깝게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 살다가는 어느 때에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진실하고 착하게 서로를 위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한인 공동체를 만들어 가면 좋겠다. 우리는 한인공동체 가족이다. 그러니 지역으로, 정치로, 종교로, 사상으로 서로를 비난하고 나누지 않으면 좋겠다. 결실의 계절, 드높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넓은 가슴으로 멀고 가까운 가족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전하며 살자. ▷410-818-8213, [email protected] 이완홍 신부/메릴랜드 성공회 성요한 교회

2017-10-18

[살며 생각하며] 이성과 신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청문회 때문에 창조론이 새삼 논란이 되었다. 최근에 나온 말은 아니지만, 창조과학회가 주장하는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는 내정자의 신앙에 대한 소신을 보면서 신앙과 이성, 상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지구의 역사가 6000년이라고 가정하면, 구석기 시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신석기시대도 의미가 매우 약해진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규명된 모든 것들이 거짓이 되어 버린다. 1610년경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동안 교회에서 믿고 가르쳤던 천동설을 뒤집는 엄청난 반란이었다. 갈릴레오는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유죄를 선고받아 일생을 종교의 억압 속에 살다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2년 갈릴레오를 복권하며 그동안 교황청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인정하였다. 이미 세상은 다 알고 있는 상식이요, 사람이 우주를 다니는 때에 뒤늦은 교회의 반성이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무한한 정보와 과학기술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모든 정보를 보고 스스로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만큼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방법이 많아진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가 모든 지식을 독점해서 일반인들은 상식적인 것조차도 교회에 의존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요즘 부부들은 아이들을 인터넷으로 키운다고 한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율성이 커진 것이 사실이고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무시하고, 중세시대에 종교적인 권위를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억압했던 일들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깨어서 경계해야 한다. 갈릴레오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복권되는데 350년 이상이 걸렸다. 세상 어린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상식을 교회가 인정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금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비이성적인 일들이 21세기에도 일어나고 있다. 오로지 내 믿음만을 고집하며, 변화와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수백 년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어리석은 일들을 저지를 수 있다. 주관적인 주장은 때로 보편적이지 않고 상식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것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사회나 국가의 공직을 수행할 사람이 보편적이지 않은 이론만을 따르고 주장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보편적인 지식과 상식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 없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세상에 균형 있는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 살면서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편협할 수 있는가’이다. 교육을 받고 나이가 들수록 넓은 사고와 이해를 해야 하는데, 나이 들수록 또는 경직된 믿음과 사고로 인하여 더 답답해지는 것을 본다. 신앙을 갖거나 삶을 위한 수련을 하며 생각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을 넓히고 다양한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이성을 키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이성에 자기만의 신념이 들어가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고집불통이 되어 이웃과 세상을 힘들게 한다. 이성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귀한 선물이다. 상식적인 생각과 이성적인 믿음을 통해서 진리를 향해 사는 것이 참된 믿음이요, 가정과 사회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종교의 참된 가치이다. 이완홍 신부/메릴랜드 성공회 성요한 교회

2017-09-27

[살며 생각하며] 관용이 그리운 사회

가을이 좋은 것은 하늘이 깊고 넓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고 살았는데, 어른이 될수록 땅만 보고 하늘을 보지 않는다. 하늘이 좋은 것은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흘러가는 구름이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피조물이 제각기 모습을 드러내고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이 평화로운 것이다. 하늘처럼 모든 것을 품고 사는 것이 관용이다. 요즘 세상이 너무 각박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내 마음에 드는 것만 인정하려고 한다. 인종 문제나 계층 간의 갈등을 보아도 그렇고, 믿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한다. 우리 교회에 여성 사제가 새로 취임하였다. 혹자는 여자가 무슨 사제가 되느냐고 말한다. 아직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불관용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사회에 다반사로 나타난다. 심지어 자신도 약자이고 소수민이면서,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 미국 사회가 백인들만 주류로 인정하려고 하는 것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 아닌가? 세상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주인이고 공동책임을 가지고 산다. 뉴질랜드의 식민지 역사는 특별하다. 뉴질랜드의 마오리 원주민은 영국 왕실과 1840년에 와이탕이 조약을 맺음으로 토지는 마오리족이 소유하고 통치는 영국과 함께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세계사에 유일하게 영국과 원주민이 조약을 통해서 나라를 건국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뉴질랜드는 백인 이주민과 마오리 원주민 사이에 조화로운 평화가 이루어졌다. 마오리 문화와 전통은 뉴질랜드에서 상당히 존중받고 있고, 뉴질랜드인은 대부분 마오리 말을 할 줄 안다. 관용의 정신을 통해서 이루어진 평화를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민자들로 세워진 미국에 필요한 것도 이러한 관용의 정신이다. 미국을 백인들만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기득권은 인정하지만, 그것으로 소수민과 약자들을 핍박해서는 안 된다. 사실 흑인에게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백인은 유러피안 아메리칸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미국에서 몇 세대를 산 아시안도 당연히 아메리칸으로 동등하게 불리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명칭 하나에도 관용의 정신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불체자의 자녀 88만명이 쫓겨날 운명에 처했다.그 가운데 한인도 1만 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비인간적이며 잔인한 일이다. 희망을 안고 자녀들은 부모를 따라 이 땅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국인으로 성장하여 몇십 년을 살았다. 기득권자만을 위한 법으로 이민 자녀들의 인권과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하늘이 노할 일이다. 동물에 대한 생존권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이 인간에 대한 배려가 이렇게 없으면서, 세상 인권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가?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남의 일이라 방관하지 말자, 소수민과 이민자들의 권리를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란다. 메릴랜드 성공회 교구에서는 오는 19일(화) 오후 5시 30분 볼티모어 대성당에서 DACA를 지키기 위한 기도와 집회를 연다. 우리들의 문제이다. 참여도 하여 우리도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소수민들의 아픔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 우리 한인사회가 관용의 정신을 세우는데 일조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해 본다. 이완홍 신부/메릴랜드 성공회 성요한 교회

2017-09-12

[살며 생각하며] 중용(中庸)의 마음

중용(中庸)이라는 말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과하거나 부족함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어떤 것에 대하여 한쪽에 편중되지 않고 중심에서 서로를 아우르고 포용하는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한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 가운데 우려되는 것은 사회가 극단주의에 빠져드는 것이다. 지난번 대한민국의 촛불과 태극기 시위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분열을 모두가 느꼈을 터이기에 고민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런 극단적인 사회적 분열은 사회적으로 큰 상처를 남긴다. 요즘 국가주의, 민족주의, 좌파, 우파라는 말을 사용해서 편을 가르고, 그 안에 넣으려는 경향이 있다. 종교적으로도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정확히 틀린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어느 한쪽에만 온전히 동의하지도 않고, 어느 한 곳 속하는 것도 불편하다. 이런 극단적 현상들이 드러나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것을 보여준다. 한동안 세계가 하나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는 한 세상이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손을 맞잡고 글로벌한 세상을 기대하였다. 이렇게 손을 잡아야 한다. 서로 생각과 사상, 종교와 문화가 달라도, 그것 때문에 사람들의 가치를 깎아내리거나 심판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여기에 중용의 정신이 담겨 있다. 중용은 평화를 이루는 정신이다. 내가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하다. 내 생각과 믿음이 좋다면 남의 생각과 믿음도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이런 상식을 깨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평화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중용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손잡고 이해와 화해를 먼저 생각하고 아우르는 넓은 가슴을 준비해야 한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사랑만으로 채우려 해도 세월이 부족하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는 어느 극단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존중하며 사는 사람이 더 많고, 그들은 세상의 상식과 평화를 이루는 중심된 구성원이다. 교회적으로는 16세기 영국교회 개혁 시기에 신·구교 싸움으로 많은 희생과 갈등을 겪으면서 교회가 화해와 평화를 찾던 중, 중용의 정신을 따라 신·구교를 아우르는 중용의 신앙을 추구하는 성공회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것이 성공회의 전통이 되었다. 중용의 마음을 가지려면 스스로 성찰과 수련을 해야 유지할 수 있다. 너그러움과 용서와 이해는 중용의 정신 안에서 나올 수 있는 덕목이다. 신앙인으로서 생각해본다. 종교를 가지고 기도하며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이웃과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정죄하며 다툰다면, 신앙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은 더불어 평화를 이루어 하늘나라를 우리 안에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통합과 평화가 절실하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나의 것만 주장해서 분열하기보다는 모두를 감싸 안는 중용의 정신이 퍼지기를 바란다. 그 안에서 평화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인 프란치스코의 기도의 서두를 적어본다.“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완홍 신부/메릴랜드 성공회 성요한 교회

2017-08-08

[살며 생각하며] 감동을 주는 사람

21세기는 감성적인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기계적인 사람보다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좀 더 창의적이고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일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상은 무언가로부터 감동하고 싶어 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많이 건조해졌다. 감동할 일보다는 감정이 상할 일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상식이 난무하고, 기대치는 낮아지고, 사람은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다. 지금 미국의 상황도 가관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언론과 국민을 상대로 장터에서 싸우듯이 언쟁과 싸움을 연일 벌이고 있다. 국민은 싫다는데 억지로 밀어붙이고 거짓말과 폭언을 공공연히 한다. 이렇게 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리더는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특히 한 국가의 대통령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감동의 전도사여야 한다. 그래서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생각하며 해야 한다. 국민을 존중하고 섬기는 것이 대통령이 갖추어야 할 당연한 덕목인데, 많은 국민이 느끼는 홀대와 핍박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누구도 인간을 억압하거나 지배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귀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어야 할 것은 상처와 분노가 아니라 감동이어야 한다. 감동의 시작은 내가 받고 싶은 만큼 남에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 부부 사이에도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상대에게 최선을 다한다면 행복한 가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예수와 모든 성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세상에 감동을 주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천국같이 될 것이 분명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상처받은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믿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인생에서 감동의 시기는 전혀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는 감동의 시간이 분명히 있다. 다만 그것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고 있을 뿐이다. 옛말에도 감사는 물에 새기고 원망은 돌에 새긴다고 하지 않던가? 이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오히려 원망을 물에 새겨서 흘려버리고 감사를 돌에 새겨서 늘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나는 일 년에 한 번은 가족 여행을 한다. 이때만큼은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먼저 아내에게 모든 선택권을 준다. 준비에서부터 모든 것을 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한다. 그리고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함께 여행하는 동안 온 가족이 기억될만한 감동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이것으로 우리 가족은 일 년 동안의 행복에너지를 충전한다. 돈으로 하는 여행이 아니라 가족애를 가지고 하는 여행이기에 그만큼 효과가 크다. 감동의 삶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헌신과 배려와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는 감동이 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한 번의 인생을 공평하게 선물로 받았다. 그 귀한 삶을 통해서 어떤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할 것인지는 주인공인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감동할 준비가 되었다면 그것을 행하라. 이완홍 신부/메릴랜드 성요한성공회

2017-07-24

통일·미래를 위한 공동체 회복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화통일에 대한 성직자의 고백을 적어본다. 통일을 왜 해야 하는가?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하는데 왜 소원이 되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경제적, 군사적,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인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궁극적인 것일까?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근간이 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원적이 평남 성천이다. 그곳이 내 고향이다. 그곳에 조상의 땅이 있고 선산이 있고, 뿌리가 있다. 나는 명절이면 고향을 찾아가는 귀성객을 가장 부러워하며 살았다. 찾아갈 곳이 없다는 것처럼 서글픈 일이 없다. 그래서 통일을 늘 원했다. 가족과 혈육을 만나기 위한 것보다 더 간절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는 이념도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있어서 통일은 민족공동체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공동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통일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통일, 정치적인 통일, 사회적인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온전한 통일이 아니다. 통일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하튼 엄청난 변화들이 한반도에서는 벌어질 것이다. 이 엄청난 일도 작은 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공동체 운동으로부터라고 생각한다. 강원도 예수원을 다니면서 대천덕 신부를 통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보게 되었다. 다양하고 생각과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님 안에서 어울려 살 수 있는가? 그리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가? 근본적으로는 분배의 문제이다. 대천덕 신부의 비전은 성서대로 살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살 수 없다면 성서는 거짓말이고 예수는 헛것이다. 그는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각기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남북의 통일도 나눔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먼저 나눔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나눔을 위한 인식의 변화가 우리 사회에 있어야 한다. 남북이 서로 나의 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 마음 없이 통일을 논할 수 없다.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통일되면 큰 횡재를 하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개발, 사업, 인건비 절약 등등. 이것이 통일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은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남북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 퀘이커 공동체는 세계평화에 가장 많이 구체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평화센터를 중심으로 전 세계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공인된 교인은 전 세계적으로 33만밖에 안 되지만, 그 활동은 여타 기독교가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 세계 곳곳에서 평화, 환경 운동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대부분 퀘이커 쪽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면 맞다. 현재 필라델피아의 펜들힐에 퀘이커 평화센터가 있다. 그곳에는 전 세계사람들이 모여서 참된 평화를 배우고 간다. 이들은 공동체로서 연대하며 활동을 하고 있다. 요즘 같이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을 버리고 공동의 선을 위해서 헌신하는 그 삶이 존경스럽지 않은가? 통일 운동은 평화운동이다. 우리 민족의 미래가 달려있다. 이것은 한반도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일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절대적인 일이다. 우리 민족공동체의 운명은 통일에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통일을 노래하고 있다. 이완홍 신부/메릴랜드 성요한 성공회

2017-07-10

[살며 생각하며] 존중(尊重)받는 어른이고 싶다

나는 조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항상 ‘어떤 분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어느덧 나 자신이 그분들의 자리를 넘보는 나이가 되어, 어른으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세대 간의 갈등을 보며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하게 된다. 나이 들어도 가족이나 이웃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고 시대의 흐름을 잘 따라 살면 최소한 ‘꼰대(?)’ 소리는 피할 수 있을 것 같고, 젊은이들과 더불어 소통도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른으로서 사는 생각을 몇 자 적어본다. 유교의 효(孝) 사상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중의 관계를 의미하고,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 종교에서도 가족과 이웃 간의 예의는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사실 효는 어른만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의 존중이 그 안에 깔려있다. 오래전 강화도에서 사목할 때 마을 종갓집에 효자문이 세워져 있었다. 그때는 그 자녀들이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집안 어른들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효자문을 어른들이 세워준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아무리 효심이 지극해도 부모의 사랑과 헌신을 따를 수 없다. 그래서 효자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혜로운 어른들이 자녀들의 정성에 답하여 효자문을 세워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실제로 어느 집에 아들 내외가 시아버지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치매 환자가 계시니 집안 분위기가 평안할 리 없고, 남편이 병든 아내의 수발을 드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람들을 만나면 아들 내외를 칭찬하고 자랑스러워 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녀들의 도움이 크다는 것이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며느리가 사주었다고 자랑하고, 아들 내외를 향한 감사를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결국 소문이 퍼져 그 지역에서 아들, 며느리에게 효자 효부상을 주었다. 부모님 덕분에 그들은 큰 명예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상을 받은 이들이 부모에게 어떻게 하며 살았을까? 결과적으로 효자녀는 지혜롭고 훌륭한 부모가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 들어 불평만 하고, 고집을 부리다 자녀들과 불화하며 사는 사람들을 본다. 똑똑한 어른은 많은데 지혜로운 어른이 없다는 말이 있다.  미국에 사는 자녀들은 교육받고 소통이 되니, 세상의 정보가 훨씬 많고 이 사회를 잘 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예전에 살아온 세월을 말하고, 경험을 내세워 내 말만 들으라는 어른들이 있다. 소통이 안 되면 젊은이들은 어른의 곁을 떠난다. 자녀나 젊은이들에게 답답한 꼰대 노릇을 하면 끼워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말은 줄여야 하고 듣기를 많이 해야 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다양한 책을 보고 새로운 상식을 넓히고 자아 성찰에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젊은이들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나서지 말자. 우리도 그렇게 실수하고 넘어지며 지금까지 잘 살았다. 그것이 청춘이요, 성숙의 과정이다. 어른들은 어린 세대를 너그럽게 대하고 칭찬하고 아껴주는 것으로 존중을 받는다. 그러면 젊은이들이 스스로 다가와 지혜를 구할 것이다. 그때를 인내로써 기다리자. 이것이 서로 존중하며 기나긴 노후를 행복하게 더불어 사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자녀들을 모두 효자녀로 만들어 보자. 그것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있다. 이완홍 신부/엘리컷시티 성요한 성공회

2017-05-18

[이완홍 칼럼]우리 이웃을 위한 행진

이웃이라는 말은 가까이 사는 사람, 가까이 사는 집이라고 설명한다. 이 말처럼 정감 어린 말이 있을까? 그래서 이웃은 가족처럼 친근한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에게 이웃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 본다.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문을 닫고 소통을 않는 시대에 사는 것 같다. 마치 외로운 성과 같아서, 스스로는 만족하지만, 이웃은 없다. 라티노 이민자들을 돌보는 사제가 어느 집을 방문하여 문을 두드리니 그 안에 있던 여인이 문을 조금 열고 쳐다본다. 그녀의 두려움에 가득한 눈빛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두려움 속에 문을 활짝 열지 못하고 숨죽이고 사는 이웃들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 이 나라는 하루하루를 이웃의 배려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이민자나 난민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자리를 잡고 평안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고, 우리 이웃을 위하여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책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민자 난민을 위한 행진’을 위해 지난 4일 볼티모어 시내 성바오로 성공회 교회에서 모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300여 명이 모여서, 이곳에 함께 사는 우리의 작은 이웃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한 행진을 시작하였다. 인종, 종교,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와 정치적인 이해로 차별받으며 자유롭게 살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 위험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상을 평화롭게 바꾸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자리를 갖는 것이다. 성공회 메릴랜드교구의 이민자, 난민을 돌보는 단체(ERICA)를 중심으로 모였지만, 일반인과 성공회, 천주교 주교와 성직자, 개신교인 모두가 함께하였다. 특별히 눈에 띈 것은 어르신들의 참여가 많았다는 것이다.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두 시간을 걸으며, 구호도 외치고 피켓을 보여주며 우리의 약한 이웃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평화롭게 어울려 살자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들의 열정은 차가운 바람을 막아내기에 충분하였다. 가는 길마다 시민들의 참여와 지지를 받으며 행진하였다. 세인트존스 성공회에서도 한인 다섯 분이 참여, 우리도 이 땅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함께 전할 수 있어 뜻 깊었다. 성공회 대성당에 도착하여 여러 명의 소감을 듣고, 특히 가나 난민의 어려운 삶을 들으면서 자기만의 안전과 평안을 위해서 사는 것이 결코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땅의 주인은 내가 아닌 우리가 되어야 하고,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은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한 공동의 선이 목표가 될 때 비로소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지 않겠는가? 실제로 한인들은 다양한 이민자와 난민들과 더불어 살고 있고 살아야만 한다. 때론 그들의 도움으로 비즈니스와 삶이 채워지고 있기도 하다. 이들을 단순 노동자로만 취급하여 일당을 주는 수직적 구조보다 이웃으로 바라보고 대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더불어 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이웃이 다양해지고 확장될수록 세상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따뜻한 인정으로 감싸 안고 더불어 살아갈 때 미국은 더욱 안전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웃을 위하여 더 많은 행진을 해야 할 것이다. 이때 우리 한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이 사회가 우리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데 인색함이 없을 것이다.

2017-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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